하는 것마다 실패하는중졸의 불우한 젊은 시절

하는 것마다 실패하는중졸의 불우한 젊은 시절

그의 삶을 크게 세 단계로 정리될 수 있다. 3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서의 생활, 40년대 미국의 독립혁명에 대한 후속 투자, 50년대 프랑스혁명에 대한 참여 등이 그것이다. 한 사람이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혁명인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혁명이 일어난 페인이 있었던 것처럼 그는 억울함을 참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서섹스의 루이스에 있는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뇌물을 받는 등 간접세무관리가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본 페인은 ‘간접세무원의 문제'(1772년)를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세무공무원의 비리를 근절하는 유일한 방법은 급여를 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무당국은 거꾸로 던져졌고, 페인은 공직에서 힘든 경력을 쌓은 끝에 결국 해고되었다.

영국에는 페인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육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적인 명료성과 뛰어난 논리로 도처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영국에서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첫 번째 결혼 상대자로부터 1년도 채 안 되어 세상을 떠났고, 앞서 두 번째 부인과 헤어졌고, 세무서를 빠져나와 사업에 실패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만난 벤자민 프랭클린은 페인에게는 일생일대의 유령이었다. 프랭클린은 “미국은 당신 같은 젊은이가 피를 끓고 있는 꿈의 땅이다. 너처럼 선구적인 두뇌를 요구하는 거야. 미국에서 행운을 빈다.” 프랭클린은 나에게 소개서를 썼다. 꿈나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했다. 배 위에서 2주 동안 페인은 열이 나서 끓는 몸 속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1774년 11월 30일, 페인은 마침내 꿈의 땅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펜실바니아 잡지”의 기자로 일하면서, 익명으로나 가명으로 논문과 시를 출판했다.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1775년)는 노예 거래를 비판하고 흑인에게 완전한 인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하는 논평에서 썼으며, 마지막에 “정의와 인간성”이라는 표식을 추가했다. 이때 이미 페인은 정의와 인권을 주장하는 혁명가로 재선임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 전투 이후 페인은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미국이 더 이상 영국 정부의 세금에 항의할 것이 아니라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과 민주 공화국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문이 1776년 1월 10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아메리카 대륙을 뜨겁게 달궜던 짧은 책자였다. 페인의 책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의 독립을 막은 영국 정부와 더욱 강경한 대립에 직면했다.

페인은 독립전쟁에 자원하여 네브라스카 그린 장군의 부관 역할을 했다. 그 사이 1776년 12월 19일 《미국 위기》(1)》를 계속 출간하였다. 이 시리즈는 1783년까지 무려 16회에 걸쳐 연재되며 각 글에 “상식”이라는 서명이 붙는다. 그만큼 자신의 주장은 상식일 뿐이고, 적어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할 때”라는 의미 있는 구절에서 시작된 미국의 위기 1호는 너무나 파괴적인 기사였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발리포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읽으라고 명령했다.

미국 독립을 위해 분신을 꺼리는 동안 페인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의 책 한 권당 수십만 부가 팔렸지만 그는 책을 싸게 만들고 널리 배포하기 위해 로열티를 받지 않았다. 그는 가난을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자 의회에 재정적 원조를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의회에서 반대파들에게 무시당했고, 대신 펜실베니아에서 500파운드를 받았고 뉴욕의 뉴로셸에서 농장을 받았다.

페인은 전 세계적으로 ‘상식’이 관찰되지 않는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1787년 영국으로 건너간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검토(1790년)에 반발해 ‘인간 권리'(1791.33)를 출판했다. 페인은 미국의 독립을 주창하는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버크가 거절하자 페인은 <인권 제2부>(1792.217)를 발표하며 반박했다. 인권 1, 2부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토대였지만, 기득권층의 안목이었다. 페인은 유럽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원인을 분석하고 빈곤, 문맹, 실업, 전쟁 등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모든 국민의 인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자의 권리를 제한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페인은 공교육과 빈민 구제를 위한 공공사업, 노인 연금, 실업 등을 위한 공공사업이 이뤄져야 하며, 비용은 누진적 소득세 징수 등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이 책의 판매를 금지했고 출판사를 감금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페인은 체포 명령을 받았다. 페인은 체포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프랑스 전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프랑스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에서는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법적 이익을 박탈당한 사람이 연좌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도 페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군주제 폐지에 환호하면서도 루이 16세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잃은 왕은 페인에게는 단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급진파가 집권하자 페인은 1793년 12월 28일 투옥되었고, 이듬해 11월 4일 로베스피어의 몰락과 함께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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